개요
초기 항공전략 사상가들은 적의 산업시설에 바탕을 둔 전쟁수행 능력의 마비를 통한 승리를 주장하였다. 그러한 이론을 발전시켜 전쟁의 통제라는 측면에 주목하고 적의 지휘·통제체제에 대한 전략적 마비를 강조한 현대 항공전략 사상가들이 등장하였다. 이른바 전략적 마비이론가라고 불리는 존 보이드(John Boyd)대령과 존 와든(John Warden)대령이 그러한 부류에 해당된다.
보이드와 와든의 마비이론은 상호 보완적이다. 보이드가 적보다 빠른 작전을 주장하는데 반해 와든은 첨단기술을 통한 전략적/작전적 우위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보이드가 적이 대응할 수 없는 매우 유동적이며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 것을 주장하는데 반해 와든은 적의 주요 전략적/작전적 중심에 대한 병행 공격을 주장하였다. 또한 보이드가 적의 "OODA 과정"에 대한 작전을 통해 지휘통제 과정을 와해하는데 중점을 둔 반면, 와든은 5개 고리의 상호의존적 체계에 대한 공격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호보완적인 보이드와 와든의 이론은 다른 모태로부터 태어난 쌍둥이 사상이다.
보이드와 와든의 이론은 서로를 보완하며 지휘·통제체제를 통한 전략적 마비이론의 시대를 열었다. 보이드와 와든, 이 두 명의 공군출신 사상가는 전략적 항공이론의 근본적 변화-경제적인 개념을 통한 마비이론으로부터 지휘·통제체제를 통한 마비개념으로-를 이루어 놓았다. 이러한 전략적 마비이론은 전쟁형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미래 정보시대에서도 여전히 지배적인 사상이 될 것이다. 보이드와 와든이 주장하는 지휘·통제체제를 통한 전략적 마비의 추구는 우리 공군인들이 준비하는 미래 항공력의 조직, 준비, 적용에 대한 최선의 방책들을 내포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함대를 호위하고 있는 제펠린 비행선
1. 3차원 공간의 활용
- 인간이 공중을 날고자 하는 꿈을 실현하기까지는 2천년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욕망은 기구의 발명과 사용에 의해서 달성되었다. 기구가 등장하게 되자 하늘과 기구를 군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시도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 1859년 6월 24일 프랑스군은 솔페리노(Solferino)부근에서 오스트리아군 진지에 대한 사진정찰을 수행함으로써 기구를 최초로 군사적으로 사용하였다.
- 이후 1870년 보불전쟁 중 프랑스 수도 파리가 포위되자 프랑스군은 연락이나 탈출 등에 기구를 이용하여 독일군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었다. 전쟁에서 기구의 사용이 더욱 활발해짐에 따라 새로운 전쟁 수단을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노력과 기대감이 더욱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 기구는 군사적으로 활용이 증가되었지만 조종성과 안전성 측면에서는 많은 제한점들을 갖고 있었다. 국가들은 추진력을 보유한 비행선을 연구하였고, 가솔린 엔진의 발명에 따라 조종 가능한 비행선이 개발되었다. 비행선의 항속거리와 화물 탑재량이 증가되자 대형 기구들이 군사분야에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독일은 항속력과 탑재능력이 뛰어난 비행선 제펠린(Zeppelin)호를 사용하여 영국을 공습하였으며, 수도 런던까지 공격할 수 있었다.
- 영국에 대한 공습은 1915년 1월 19일부터 1918년 8월 5일까지 37회에 걸쳐 수행되었다. 당시 독일은 비행선을 주로 심리적 효과를 달`성하려는 목적으로 이용하였고, 연합군은 독일과 달리 비행선을 연안경비, 기뢰탐색, 잠수함탐색, 선단호위 및 잠수함 공격 등 전술적 목적에 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비행기가 등장하게 되자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리고 방어에 취약했던 비행선이나 기구는 군사적 이용가치를 상실하고 1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차대전 중 비행선에 의한 폭격이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3차원 공간을 군사적으로 사용하면서 방공과 항공기지에 대한 공습이 중요하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다.
2. 공중전력의 영향력 증대
- 1차 세계대전을 통해 항공력이 전쟁에 등장하였으나, 기구와 비행선이 많은 제한점을 갖고 있었고 비행기 역시 부분적으로 밖에 활용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초기의 항공 전략가들이 항공력의 중요성을 주창하면서 육군과 해군 중심의 기존 전쟁수행 방식에 대해 강도 높게 비난하자 그들에 대한 거부감도 강하게 존재하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 항공기는 성능과 탑재무장이 개선되어 지상군 지원을 위한 폭격임무에 수행하였으며, 3차원 전력으로서 우월성을 과시하게 되었다.
- 당시 프랑스는 항공기를 사용하여 모로코에서 토착민들을 상대로 지상군들이 발휘하지 못했던 효과를 제공하였다. 프랑스는 보병과 기병들을 투입했으나 지형에 익숙한 모로코의 토착민들을 상대로 별다른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항공기를 투입하여 기총공격과 폭격으로 토착민들의 저항을 약화시켰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었다.
- 1935년에는 이태리 공군이 에티오피아 원정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에티오피아의 작전지역은 해발 2,000m∼3,000m의 산악지대이거나, 사막과 삼림지대였기 때문에 이태리군에게는 익숙하지 않았고, 작전수행에도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군사전문가들은 이태리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려면 6년이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태리는 이태리 공군의 공중정찰, 폭격 및 기총, 가스, 소이탄공격과 공중보급 등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단 1년만에 에티오피아 전 국토를 점령할 수 있었다.
- 그러나 1936년에서 1939년까지 계속된 스페인 내전에서는 항공력이 또 다른 상황에서 운용되게 된다. 스페인 내전은 에티오피아의 상황과 달리 쌍방이 모두 항공전력과 지상의 대공화력에서 동등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중우세를 획득하는 것이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부각되었다.
- 스페인 내전에서 이태리 공군과 독일 공군은 「프랑코(Franco)」장군 측을 지원하였고, 소련은 공화파를 지원하면서 국제적인 항공전이 이루어졌다. 양측은 이 전쟁을 통해 항공력 운영에 대한 많은 경험을 쌓았으며, 특히 독일 공군의 경우에는 2개 단위의 편대군으로 전투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실전에 적용함으로써 공중전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공중우세가 지·해상 작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인식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항공력이 1차 세계대전의 승패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기에는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차 항공기의 대규모 운용과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한 공감대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 여전히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육군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지상군 절대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 해양에서도 이러한 문화는 동일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함대가 항공기에 대해 위협을 받은 적이 없었고, 해군에는 해군력에 관한 보수주의자들의 전통적인 사고가 지배적인 상태였다. 비록 항공부대의 가치가 높아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거함·거포주의 원칙 하에서 해군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는 실제로 많은 전함과 순양함이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고서야 바뀌게 되는데, 이러한 사고들이 공군의 증강과 독립의 기회를 억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