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파키스탄 전쟁 (1971.12.3 ~ 16)
1. 전쟁으로 비화된 종교적 갈등
-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주된 원인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등의 여러 요인들이 복합되어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지역은 16세기초 무굴제국 이후 단일 통치체제를 형성하였으나, 1858년 영국의 직접통치가 시작된 이후 분할 통치정책에 의하여 대립과 갈등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 이후 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영국의 통치가 종식되자 임시정부 구성을 놓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간 갈등은 더욱더 고조되었다. 마침내 1947년, 힌두교는 인도로 이슬람교는 파키스탄으로 각각 분리·독립하면서 두 국가간에 분쟁의 불씨가 싹트게 된다.
- 가장 쟁점이 된 곳은 카슈미르 지역으로, 종족구성상 파키스탄에 귀속예정이었지만 힌두교 지도자가 군사원조를 대가로 인도에 통치권을 넘기게 되고, 이로 인해 1948년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의 결과는 유엔의 중재로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카슈미르의 3분의 1은 파키스탄, 나머지는 인도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인도와 파키스탄의 영토 다툼은 1965년 8월과 9월, 2차 분쟁이후 유엔의 개입으로 휴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 후 동·서파키스탄의 분리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대규모의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동·서파키스탄은 인도를 사이에 두고 1,600km 이상 분리되어 언어와 문화, 전통은 달랐지만 종교와 인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에 한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971년 3월 東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이에 대해 西파키스탄은 군대를 투입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전황은 게릴라전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 이즈음 독립을 선언한 방글라데시 지도자들이 인도와의 접촉을 가속화시키자 인도로서는 사태개입이 불가피하게 됨에 따라 동·서 파키스탄의 게릴라전은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의 전면전으로 확전되었다.
2. 파키스탄의 실패한 기습공격

- 12월 3일, 파키스탄은 정면의 인도 군을 격멸하고 카슈미르 주요지역 점령을 위해 항공기습을 단행하였다. 선제공격으로 인도의 동파키스탄 전선에 대한 압력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파키스탄은 전쟁개시와 동시에 공군력을 이용하여 인도의 주요 공군기지를 기습 공격하였고 인도 공군은 기습 5시간 후에나 반격을 시작하였다.
- 그러나 파키스탄의 선제기습은 축차적 분산공격으로 인도 공군의 주력을 격멸하지 못했으며, 초전에 소규모인 32대의 항공기만이 공격에 참가하여 기습효과도 미미하였다.
- 또한 한번에 너무 많은 목표를 공격했기 때문에 한 비행장에 3∼4대의 공격기만을 투입함으로써 많은 피해를 가하지 못했다. 더구나 대부분의 인도 전투기는 분산되어 있었으며 방호벽으로 보호되어 손쉽게 공격할 수 있는 목표로는 활주로와 건물밖에 없었다. 한편 기습공격 시간을 박모로 선택하여 계속적인 전과확대를 진행 할 수 없었고, 인도 공군에게 야간을 이용한 반격준비시간을 허용하게 되었다.
- 파키스탄은 국토가 동서 1,000마일로 양분되어 군사력의 상호지원이 불가능하였으며, 병력과 공군력이 열세하고 지상 작전과의 연계가 미흡하여 합동작전이 효율적으로 운영되지도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파키스탄은 초기 항공력을 이용한 선제기습 공격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타격을 가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기습효과와 연계한 전과확대를 기할 수 없었고 전쟁의 주도권을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물론 전반적인 국력과 군사력의 열세도 작용하였지만 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부족과 항공력의 효율적 운용능력 부재로 현존 전투력을 극대화하지 못함으로써 전쟁에서 실패하였던 것이다.
3. 인도의 제공권 장악과 승리
인도는 전반적인 국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총병력과 공군력이 우세하였다. 소련의 조기경보통제기(TU-126)를 지원받아 파키스탄 공군활동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여 정확한 목표공격으로 공중우세를 확보하였으며, 합동작전 운용으로 전과를 확대하였다. 인도는 西파키스탄 국경을 사수하면서 東파키스탄을 점령하기 위하여 적극적 공세작전을 수행하였다. 서부전선에서는 인도, 파키스탄 쌍방 모두가 국지적 공중우세만 확보하였고, 동부전선에서는 인도 공군이 파키스탄군의 항공기와 비행장을 효과적으로 공격하여 제공권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항공력의 운용에서 집중의 원칙을 적용하여 개전 2일째 총 500회의 공격을 실시하는 한편 지상 방공망을 강화하여 파키스탄 공군활동에 제약을 가할 수 있었다. 이후 인도는 압도적 우세의 항공기를 투입하여 제공권을 장악하고 근접지원과 기갑부대를 이용하여 東파키스탄 내로 진격함으로써 12월 16일 東파키스탄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